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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

한감자 2018. 2. 15. 14:41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중종 37년(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을 기리고자 안향이 어릴 때 공부하던 숙수사 터에 사당(文成公廟)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영정을 봉안하고, 그 다음해(1543년) 백운동(白雲洞) 서원을 창건하고 유생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할 때 나라에 상소를 올려 명종 5년(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으면서 서적, 노비, 토지를 함께 하사받게 되어 우리나라 사액서원(賜額書院)의 효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 소수서원 웹사이트 : http://www.yeongju.go.kr/open_content/sosuseowon/index.do
☞ 이전에 다녀온 글 : http://hangamja.tistory.com/299

                              http://hangamja.tistory.com/209

 

주차장에서 소수서원 반대편을 바라보니 소백산에 눈이 쌓인 풍경이 참 멋져 보입니다.

 

 

매표소에서 입장요금을 계산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멋진 소나무숲이 반겨줍니다.

안내에 따르면 3백년에서 길게는 천년에 가까운 적송나무 수백그루가 서원 주변에 있다고 합니다.

 

 

소수서원 입구 앞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서있습니다.

원래 이곳이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宿水寺)'란 절이 있엇는데 세조 3년(1457년)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인근의 '승림사(僧林寺)'와 함게 소실되고 당간지주만 났았다고 합니다.

안향 선생이 어린 시절 이 절에서 독학하신 관계로 서원 건립시 놋그릇 기백근을 발굴하여 집기마련 비용으로 충당했으며, 서원 경내에도 건축 부재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숙수사지 당간지주 건너편에는 아주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원이라는 역사적인 장소라는 생각보다는 참 멋진 풍경을 만난다는 느낌이 먼저 생겨납니다.

 

 

입구 오른편에는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인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1543년 주세붕 선생이 세운 우리나라 서원 정자로는 제일 오래 되었다고 합니다.

 

 

경렴정 아래 흐르고 있는 죽계수(竹溪水) 건너편에 취한대(翠寒臺)가 보입니다.

 

 

정문 왼편으로는 제사를 지낼 때 쓰이던 희생(犧牲)의 흠결여부를 검사하던 '성생단(省牲壇)'이 있습니다.

 

 

소수서원 정문의 이름은 '지도문(志道門)'입니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곳인 '강학당(講學堂)'으로 보물 제1403호입니다.

사방으로 툇마루가 둘러있고 기둥이 배흘림 양식입니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선생이 이곳을 세울 때의 이름은 '백운동(白雲洞) 서원'이었지요.

 

 

강학당의 서쪽 뒤에 '문성공묘'가 있습니다.

서원의 기본 구조는 중국식은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해서 학교(강학당)을 앞에 세우고 사당을 뒤에 세우는 것으로 대부분의 서원이 이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로 동쪽에 학교를 세우고 서쪽에 사당을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통 위차법(位次法)인 '이서위상(以西爲上)'과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랐다고 합니다.

 

 

보물 제1402호인 '문성공묘(文成公廟)'는 회헌 안양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후에 '안보', '안축'을 배향하고 '주세붕'을 추배하여 네분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성공묘와 장서각 앞에는 밤나들이할 때 서원경내에서 지장이 없도록 돌기둥을 세우고 관솔불을 켜놓던 '정료대(庭燎臺)'와 제향할 때 제관들이 손을 씻던 자리인 '관세대(盥洗臺)'가 있습니다.

 

 

'장서각(藏書閣)'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어제 내사본'을 비롯한 3천여권의 장서를 보고나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강학당 뒷편에는 소수서원의 원장과 교수 제임 등이 함게 기거하던 집무실 겸 숙소인 '직방재'와 '일신재'가 있습니다.

 

 

'직방재(直方齎)'의 현판 글시는 퇴계 이황 선생의 글씨를 판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직방재 뒤에는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재던 일종의 해시계인 '일영대(日影臺)'가 있습니다.

 

 

장서각 뒷쪽에는 안향 선생을 비롯한 다섯분과 주희(주자)의 초상을 봉안한 '영정각(影幀閣)'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 왼편에 보이는 초상은 공자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주자학(朱子學)으로 체계화시킨 회암 주희(朱熹)이고, 오른편은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의 초상입니다.

이 밖에도 신재 주세붕, 한음 이덕형, 오리 이원익, 미수 허목 선생의 초상이 있습니다.

 

 

영정각 옆에는 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해 두던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지금은 공사중이라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직방재와 일신재를 기준으로 영정각 반대편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습니다.

 

 

소원 구경을 마치고 뒷쪽 문으로 나가면 사료관(史料館)이 있습니다.

 

 

사료관은 서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설명과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세조 3년(1457년) 10월 단종복위 거사가 관노의 밀고로 실패하면서 이 고을의 유생들과 부민들이 참화를 당하고 순흥부는 폐읍되었습니다.

이후 숙종 9년(1683년)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 의사들이 신원된 후 주세붕 선생이 이곳에 서원을 세웠고, 퇴계 이황 선생의 사액() 요청에 명종이 대제학 신광한에게 이름을 짓게 하여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 )'는 뜻을 담은 '소수(紹修)'로 결정하고 명종 5년(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료관 서쪽에는 서원의 잡일을 맡아 보던 관리인이 거처하는 공간인 '고직사(庫直舍)'가 있습니다.

 

 

고직사와 사료관 뒷쪽으로는 '충효교육관'이 있습니다.

 

 

소수서원의 맥을 잇고자 서원 유림들이 신교육이 들어오면서 이곳에 사립 소수중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지만 6·25 이후 학생수 증가로 1965년 읍소재지로 옮겨지고 충효교육관을 세웠다고 합니다.

 

충효교육관 마당 앞에는 숙수사지에서 출토된 석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제 저 문을 나서면 선비촌 영역으로 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하지 않고 존속한 서원 47곳중 하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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